몽고는 다루가치를 개경에 주둔시켜 고려의 내정과 조공에 간섭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하게 된 최우는 일단 몽골과 강화는 하였으나 몽골에 대한 노골적 거부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고종과 함께 강화도로 천도한다. 천도 후 최씨정권은 조공을 끊고 몽골에 대항한다.
고종 19년 8월 몽고의 침입
서북부 지역 점거 왕과 최우의 몽고 입조 , 개경환도 요구 고려의 거절
고종 28년 11월 오고타이 사망
1244년 구육의 칸 등극
고종 34년(1247) 몽고군 침입
고종 36년(1249) 구육의 죽음 - 회군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가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
삼별초만이 끝까지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분연히 일어난다.
삼별초(三別抄)는 정규군이 아니었다. 사병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굳이 분류하자면 특수부대에 속하는 군대였다. 정규군도 아닌 삼별초가 왜 마지막까지 몽고와의 치열한 항쟁을 벌였던 것인가?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정권을 바꾸며 집권하지만, 사실상 민들에게 있어서는 그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다. 그들은 사치를 일삼았으며, 이를 위해 끊임없이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몽고가 침입하기 전부터 고려에서는 김사미와 효심, 만적, 망이-망소이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봉기가 일어났었다. 최 씨 정권하에
고종 18년으로 최충헌은 이미 사망하여 그의 아들 최우가 집권하고 있는 상황으로 방어군을 조직해 전방으로 파견하였지만 대패하였고 수도 개경성이 포위당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방어군이 성에서 싸우지 않고 밖으로 나가 대결하는 실책을 범한 데에서 기인하였지만, 정예부대가 최우정권을 지키느
정권을 잡은 후 신변의 보호와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강력한 무력장치가 절실히 필요하였거니와, 그는 이 문제를 경대승 때의 도방을 부활시킴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최충헌의 도방은 그의 아들 최우에 이르러 내도방과 외도방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는 다음 집정인 최항 때 확장되었다가 최
. 그러나 고려 왕실은 몽골과 결탁을 생각하게 되고 고려 왕 원종은 왕권을 되찾으려고 최씨가 다른 무인에게 몰락한 이후 임씨 무인세력을 몽골세력을 이용해서 축출하게 된다.(1270)이 과정에서 무인세력의 중심군대였던 삼별초는 남도지방에서 항거하는데 결국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압된다.
1. 문제제기
삼별초는 어떠한 존재인가. 몽고의 침략과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우다 장려한 최후를 마친 호국의 화신인가? 하지만 이렇게 단순 명쾌한 설명이 혹 과장되거나, 조작된 신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볼 필요는 없을까? 윤용혁,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정권에서는 사병과는 별도로 삼별초를 조직하였다. 삼별초는 공병·사병적 요소를 동시에 가졌던 군사조직이었고, 대몽항쟁(對蒙抗爭)기 고려 군사력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삼별초는 원종 11년(1270) 국왕에 의해 전격적으로 해체되면서 대대적인 대정부·대몽고 항쟁을 펼쳤다.
삼별초는 은연중에 우
Ⅰ. 서론
의종(毅宗 ;1127~1173)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2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이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을